동네손주 8. 학원 가기 싫은 서희, 학교 가고 싶었던 미자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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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20:05
서희는 속이 안 좋다며 학원에 못 가겠다고 했다. 미자는 우리 때 학원이 어딨냐며, 요새 애들은 학교 끝나고 학원까지 가느라 고생이라며 서희 편을 들어주었다. 서희는 미자로부터 모종의 용기를 얻어 기필코 학원에 가지 않겠다는 의지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서희 엄마는 "참아."라고 했다. 억울해서인지 짜증 때문인지 서희 속은 더더 안 좋아져서 서희는 모든 웃음끼를 잃고 배만 만졌다.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미자를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미자는 학교에 가고 싶었던 9살 미자를 회상했다. 국민학교 1년을 딱 다니고, 여느 때처럼 봇짐을 허리에 둘러매고 학교에 가려는 아침, 아버지가 미자를 불렀다.
"가방 끌러 놓으라."
미자는 영문을 모른 채 봇짐을 풀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가마 불씨를 가져다가 봇짐에 불을 붙였다. 9살 미자는 놀란 마음에 양손을 꽉 쥐고, 보자기와 책과 아끼고 아껴 쓰던 몽당연필이 타는 것만 지켜보았다. '불에 닿으면 금방 다 타버리는구나.' 9살 미자는 그 정도 생각만 했다.
사납금 내는 시기가 돌아오자 미자의 아버지는 사납금을 마련하는 대신 미자의 봇짐을 태우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미자는 그날로 동생들을 먹이기 위해 들로 산으로 바쁘게 지냈다. 국민학교 1년 말고는 미자에게 학교도, 학원도, 배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미자의 삶은 배우 지를 못해 아는 게 없어 당하기만 하는 삶이 되었다.
"세상이 참, 금방 좋아졌네요. 할머니 때는 돈이 없어 못 배웠는데, 저 때는 그래도 초등학교 수업료 같은 건 안 냈고, 요즘 애들은 급식비, 소풍비 이런 거까지 다 내주니까. 우리나라가 참 빨리도 변했네요."
"그렇지. 세상이 참 빨리 좋아졌지. 좋지, 나같이 억울한 사람도 없어지고. 나는 정말, 배운 게 너무 없어서 당하기도 정말 많이 당하고 사는 게 참 힘들었거든. 요새 아이들은 배울 수 있으니 참 다행이지. 나처럼은 안 살겠지, 다들."
"할머니 삶 자체도 계속 나아지셨죠?"
"그럼, 밥 굶을 걱정은 없잖아. 옛날에는 정말 배가 너무 고파서 풀 뜯어다가 끓여보고 별 짓을 다했거든. 근데 지금은 내가 귀찮아서 안 먹지, 없어서 굶을 걱정은 안 하잖아. 요즘이 참 좋지."
미자는 학원 가기 싫은 서희 앞에서는 서희 편을 들어주는 할머니였다. 미자에게 단 한순간도 허락되지 않았던 투정일지라도 서희의 마음을 다독이려 했다. 내가 미자와 근 1년 만나면서 불편하지 않았던 건 미자의 그러한 태도 덕분이다.
미자가 살아보지 않은 투정을 부리는 서희를 도닥일 때,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는데 투정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9살의 미자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9살 미자의 마음을 더듬어본다.
'미자야, 많이 서글펐겠다. 이제 겨우 한글을 읽을락 말락 하는 데, 그 재밌던 한글 공부도 못하게 되고, 선생님도 친구들도 못 만나게 되고, 빨래하랴 물 길랴 농사하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일만 했을 아홉 살 미자야. 고생이 많았다, 미자야.'
9살이었던 미자는 요즘 아이들은 자기처럼 당하고는 안 살거니 다행이라 말하는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한글은 겨우 읽지만 서희의 마음은 거뜬히 읽어내는 동네 할머니가 되었다. 알쏭달쏭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동네 선생님을 1년 넘게 기웃거리게 만드는 매력쟁이 할머니가 된 건 미자가 알고 있으려나.
*초등학교 학생들과 동네 혼자 사시는 할머니를 주기적으로 찾아뵙는 '동네손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자'는 저희가 찾아뵙는 할머님 가명입니다.
***아이들 이름도 모두 가명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