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뚜벅이 여행-4]돌아갈 일상에도 충만함이 있기를
# 단상1, 새벽을 보며
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정신이 또렷해서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를 나서 보니 거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이 조용히 와 있었다. 꼭 영원히 아름다울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영원 같은 새벽은 강한 아침 햇살 아래 신기루처럼 사라지곤 한다. 마치 여유롭고 부드러운 휴식 시간의 여백이 일상 속에서 순식간에 꿈처럼 사라져 버리듯이. 그런 생각을 하니, 여행을 온 이후로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 뻑뻑한 시간을 지나고 있을 한 달 뒤의 나에게, 또는 다른 교사에게 이 새벽을 한 조각 전해주면서, 이렇게 말해 주고 싶어졌다. (다시 읽어보니 조금은 오글거리는 새벽 감성이다.)
선생님. 선생님을 ‘나답게’ 살아있게 하고, 선명하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오직 영원처럼 느껴지는 달콤한 순간들에만 그 답이 있다면,
삶의 절반을 의미 없이 죽은 마음으로 지내야 한다는 뜻이 되겠죠.
우리가 매일 만나야 하는 일상에서도 다시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더 키우기로 해요.
# 단상2, 벌레를 보며
야외로 많이 다니니 각양각색의 벌레를 마주친다. 싫어하는 벌레를 보고 각자 느끼는 감정이나 반응은, 그가 자신이 싫어하는 이를 보고 느끼는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나만의 가설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내가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벌레를 보면, 그것의 존재감을 매우 크게 느끼고 긴장한다. 그것이 기어오거나 날아오지 않게,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뚫어져라 관찰하면서 움직임을 파악하고는, 최대한 나와 그 벌레의 마찰이 없도록 내쫓거나 막아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고 도망가 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재빨리 없애고 깔끔하게 처리하기도 한다. 그런 차이가 삶에서 ‘적’을 만났을 때 대처법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 단상3, 202번 버스 안에서
버스가 친절하게도 내가 가고 싶던 장소를 그대로 지난다. ‘무명서점’, 산방산, 카페 ‘사계생활’. 주민으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버스를 타고 내리는 모습이 정겹기도 하고 신기하다. 그물 비슷한 걸 들고 타는 분도 있었다.
갑자기 내 뒤에 앉아 계시던 할망이 말을 거신다.
“어디 내릴 꺼?”
내가 내리는 역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물으셔서, 열심히 스마트폰을 뒤적여 재빨리 대답했다.
“고산역이요.”
할망은 “나는 시청역.” 하신다. 대화를 원하시는가 싶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할머니도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몇 초 정적이 흐르다가...
“벨 눌러주!”
아차. 지금이 시청역이었다. 눈치가 없었다. 얼른 벨을 눌러드렸다. 그런데 역에 다 와서 버스 기사 아저씨가 문을 열지 않는다. 어르신은 가늘지만 큰 목소리로 외치셨다.
“여기서 내릴 꺼우다~!”
제주 방언이 낯설면서도 정겨웠다. 몸이 무거우신 할망이 천천히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버스에서 내리시기까지, 넘어지실까봐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굽은 몸을, 몸을 감싸고 있는 얇고 고운 보랏빛 옷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무명서점
처음에 서점이 어디있나 한참 찾았다. 알고 보니 2층이었고 입구가 있었는데 지나친 거였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끙끙 올라갔는데 인스타그램에 공지한 시각과 달리 아직 책방 문이 닫혀 있었다. 전화를 거니, 아직 오는 데 시간이 걸리니 혹시 점심을 안 드셨으면 근처에 있는 국수집에 들르시라며 추천을 해 주셨다. 캐리어를 들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긴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책방 문 앞에 맡겨놓고 맛있게 국수를 먹고 왔다.
앗, 밥을 먹고 돌아와 보니 무거운 캐리어를 안에 옮겨다 놓으셨다. 고마워라. 달리상점과는 또 다른 분위기. ‘담백하고 풍부한 느낌’이 드는 서점이었다. SNS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젊은 책방지기가 꾸리는 공간이었다. 요즘 나온 책들, 독특하고 매력있는 책들, 어디선가 많이 봤다 싶은 책들은 웬만하면 다 있었다. 종류별로 칸칸이 알차게 전시되어 있어서 좋았다. 선물할 책도 발견했다. 자수를 좋아해서 혼자 이것저것 수놓아 주변에 선물해주는 언니에게 줄 만한 책이었다.
# 단상4, 음악마다 어울리는 풍경은 다르다
이동하는 버스에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서 생명의 기쁨을 뿜어내는 것 같은 선명한 빛깔이다. 나무와 하늘, 물의 싱싱한 푸른색, 새까맣게 빛나는 돌, 밝고 반질거리는 사물들. 여름 풍경은 또렷하고 꼭 시간이 멈춰 이대로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계절은 흘러가고 여행은 끝날 것이다. 재즈 음악이 어울리는 나른한 풍경, 관현악 오케스트라의 음색이나 우쿨렐레의 상큼하고 가벼운 소리가 어울리는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이 언제까지나 그 빛깔일 수는 없는 것처럼.
새벽에 생각했던 것처럼 여행만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길,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일상이 단순히 무채색의 답답한 공간 속에서 버텨야 하는 무엇인가가 아니길 바란다.
대중음악과 관련된 책을 얼마 전에 보았는데, 도시에서 팍팍한 일상을 지내며 들어야 비로소 어울리고 제맛인 음악들이 있다고 한다. 회색빛 공간 속에서 아름답고 촉촉한 음악으로 귀호강을 하며 마음에 위로를 얻은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음악을 막상 대자연 속에서 들으면 어딘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음악이 그러하듯이, 일상에 어울리는 위로가 있을 것이고 일상에 걸맞는 충만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행이 끝나간다고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다음 여행을 기대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복닥이는 일상이라는 다른 방식의 여행 안에서 아마 나는 또다른 음악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 못 다 한 이야기
카페 ‘사계생활’은 오래된 은행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곳이다. 계산대도 은행의 접수창구 모습을 그대로 남겨 놓아서 재치 있고 새로웠다. 조금 비싸지만 소장가치가 있는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구경할 거리도 있고, 디저트가 마음에 들었다. 맛없을 수 없는 크림브륄레 위에 감귤 토핑이라니! 산방산라떼도 예쁘고 이 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메뉴라는 느낌이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달콤한 맛이 기분을 좋아지게 했다.
산방산은 버스 정류장과 무척 가까웠다. 입구를 보니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캐리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 눈으로 보는 걸로 만족했다. 구름 모자로 산의 윗부분이 온통 가려져 있어서 아쉬웠다. 산보다도 그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용머리 해안의 경치가 아름답고 웅장했다. 이번 제주에서 본 자연 중에 가장 거대한 느낌이 들었다. 안개로 많이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맑은 날에 꼭 다시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마지막 날 묵은 숙소는 제주 안에서도 시골 마을에 속하는 곳이었다. 정기적으로 해녀들이 공연을 한다고 했다.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라고 생각했는데 동네 주민들이 소복하게 모여 유쾌하게 벌이는 동네 잔치 같은 느낌에, 나 같은 여행자들이 끼어 있었다. 여행자가 더 적어 보였고, 우리나라 사람보다 외국인 가족 여행자가 더 눈에 띄었다. 한편에서 물질하는 모습도 무대 옆 바다에서 직접 보여주고, 동시에 다른 해녀들이 평소에 하던 가닥으로 일노래와 춤을 펼쳐 보였다. 80이 넘으셨다는 분도 빛나는 눈동자로 손은 악기를 부지런히 두드려가며 생명력 넘치는 공연을 함께 해주셨다. 물질이 먼저 끝나고 올라온 해녀 분들은 바쁘신지 잠수복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박력있게 몰고 무대 앞을 지나 무어라 한 말씀 던지시며 댁으로 향하시는데 그들의 잔소리와 에너지가 넘칠 듯한 평소 모습이 눈에 그려져 웃음이 났다.
홀로 다녀온 여행은 순간 순간이 새로웠다. 다음에 혼자서 떠날 여행은 또 어디로, 어떤 화두를 안고 떠나게 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혼자인 시간 속에서 낯섦도, 어색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나와 오롯이 만나는 편안함과 선택의 자유에서 오는 해방감이 컸다.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은 순간들이, 쓸모없음으로써 비로소 빛나는 순간들이 쌓여갈 때 내 마음이 더 살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