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임 줍는 교실살이-13] 초여름, 지칠 무렵, 교단일기
대구는 초여름이다.낮에 30도를 넘는 날씨가 흔하다. 쨍한 햇볕 아래 푸른 잎은 무성하고, 날파리가 공기 중에 잔뜩 섞여서 날아다니는 계절. 교실에서 더 이상 커피 포트를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고, 가장 기온이 높은 4층에서는 먼지를 닦았는데도 먼지가 계속 나오는 선풍기를 아침부터 돌린다.
가장 에너지를 쏟아부은 3월과 4월이 지나고, 이제 벌써 5월 말이라니. 왠지 너무 지친다 했다. 기분 탓이 아니라, 날씨 탓만이 아니라, 지칠 때가 되어서 그랬나보다. 왜 지쳤나, 마음의 폭풍이 몰아치던 날 우르르 마음을 쏟아내 들여다보았다.
요즘, 나는 스스로를 또 습관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더 ‘어른답고, 선생답고, 똑똑한’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실수하지 않았을 것을 ‘어리숙하고, 우유부단하고, 남들보다 부족한’ 나라서 그런 상황에 놓인 거라고. 그리고 옆에서 작은 평가라도 들으면, 그 말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어정쩡한 완벽주의가 이렇게 위험하다. 교육이라는 게 바로 성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지금 당장 보이는 성장이 없기에 더 막막하고 허무할 수 있는 활동인 걸 안다. 하지만 옆에서 보기에 눈에 뜨이는 변화를 많이 일구어낸 선생님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지금 내가 뭔가 놓치고 있나, 불필요한 부분에 몰두해서 '삽질'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한다. 너무 솔직했나?
여러 모로 바쁜 시기다. 마치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구슬을 없애던 게임에서 1탄, 2탄 정도는 쉽게 잘 하다가 높은 탄으로 올라가면서 갑자기 빠른 속도로 구슬들이 쌓여서 겁먹고 금새 게임 오버가 되는 것이랑 비슷한 기분이다. 밀려오는 일들을 우선순위대로 정리할 여유조차 없었고, 시간이 나더라도 마음이 탈탈 털린 상태에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고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 의무가 참 많기는 하다.
평소에 꾸준히 과정중심 평가를 하고 피드백을 적절히 제공해야 하며
수업 준비를 제때제때 해서 재미와 의미와 목표 달성의 삼박자를 이루어야 하고
교실에 있어야 할 게 아니라 당장 심리 치료가 필요할 행동들을 종종 만날 때 이를 껴안고 마주해야 하며
매일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고 앞에서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야 한다. 무엇을? 보고 등의 업무체계도 그렇고,
교사에게서 나오는 언어적/비언어적 표현도 하나 하나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을 잘 살펴 필요한 경우 즉시 또는 시간을 잡아 상담을 하는데, 아이가 막상 시간이 없다.
무사히 상담을 했으면 그걸 잊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폭력적인 행동이 이루어졌으면 별도의 학칙과 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할 수도 있다.
수업 방해가 심한 아이가 있으면 무시/격려/훈육 등 상황에 알맞은 방법을 택해야 하고,
아이들이 위험한 데서 놀지 못하게 하고
늘 교실, 복도, 실외에서 안전사고가 벌어지지 않는지 살펴야 하며
다치거나 아픈 아이가 있는지 잊지 않고 살펴야 하며
업무 연락을 주고받고 제때 보고를 해 내야 하며
다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이 이상의 모든 것이 순서대로 하나씩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
후유.
요즘 반짝이는 순간은 언제였나, 생각한다.
아이들이 꾀를 부리고 방해할까봐 미리 얼굴에 탄탄한 거죽 하나 쓰고 아이들을 대할 때, 나는 더 빨리 지쳤다.
그런 방어를 할 필요가 없을 때, 그래서 아이들과 서로 맨얼굴로 웃으면서 대화할 때 더 힘이 났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못된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지만 그 뒷모습이 뭔가 헤매고 있다고, 잡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아이. 그런 아이를 도울 실마리를 찾고, 아이도 그걸 믿고 따라올 때, 그것이 작은 것이라도 내 마음을 그 순간에는 뿌듯하고 벅차게 했다.
감사를, 사과를 표현할 줄 모르던 아이가 서툴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미는 것을 볼 때, 이루 표현할 수 없이 기뻤다.
잊지 말자. 반짝이는 것들을 흘려보내지 말자.
우리 반 아이들이 요새 하는 놀이 중에 기발한 것이 하나 있다. 처음에 젠가 나무를 가지고 투석기처럼 나무를 쏘아 서로의 나무를 맞히던 걸로 시작을 해서, 저마다 성벽을 쌓고 '왕'인 나무를 안전한 위치에 세워 둔 뒤 각자 잘 쏘아지는 모양의 '대포', '투석기' 등등을 마련하고 시작 신호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타이밍에 만들어둔 공격 도구들로 나무 대포를 쏘아 올린다. (다행히 위험할 만큼 높이 쏘지는 않는다.) 왕이 맞으면 그 사람은 아웃! 생각보다 창의성 개발에 좋다고 할까.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점점 참여 인원이 늘고 있다.
사실, 아이들에게 얼마 전 5. 18 과 관련해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그림책 '오늘은 5월 18일니다.'를 읽어주었다. 면지에 가득한 총 그림을 보고 기종을 알아맞히며 잔뜩 신났다가,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내가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아이들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아직 공감에 서툴고 감정의 갈래를 더 많이 익혀나가야 하니 철없는 말도 많이 하겠거니 각오했는데, 이야기에 담긴 아픔이, 이야기에서 지키려던 것이 무엇인지 함께 대화를 나누어 보니 내 생각보다 이야기가 잘 통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교실에서도 전쟁과 관련된 놀이를 좋아하고, 전쟁 영화를 좋아하며, 총에 환호한다. 그 나이쯤 그러는 것을 바꿀 수는 없고, 굳이 그렇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이제 총을 볼 때 마냥 멋지다, 에서 끝나지 않고 그림책에서 보았던 총의 어두운 모습도 함께 살풋 떠올리지 않을까. 잠깐이지만 폭력과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을 조금은 떠올리지 않을까, 멋대로 기대해 본다. 책을 칠판에 세워 두니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자꾸 들춘다. 처음엔 총 구경을 하겠다며 장난을 치던 아이들은 어느 새 가만히 내용을 다시 한 번 쭉 넘겨본다. 그렇게, 조금씩 다가가야겠다.
결론.
그러니 지쳐도 조금 더 힘을 내자.
(어제 홍삼을 주문했다. 하루에 두 팩씩 쭉쭉 들이키고 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