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수 있는 용기-4] 선생님은 '나답게' 살고 있나요?
#1. 공부의 기억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아이들에게 '공부'는 고문의 다른 이름이다. 물론 재미있는 공부도 있었지만 흔치 않았다. 특히 입시를 위한 공부니까 배우는 내용을 잘 이해하고 많이 외우는 게 관건이었다. 수업은 훈련과 같았다.
‘교사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에 불과하다, 교육과정에 적혀진 것만을 충실히 전달하라’는 시각에 따라야 할까? 산업사회의 유산으로 '효율적으로' 지식을 주입하고 전달하는 교육이 만연하다. 다행히 이런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고 점차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지역마다, 학교마다, 학급마다 학생의 특성에 맞게 재구성한 교육과정을 만들 것을 권장하고 있다. (물론 그걸 실천할 여건이 마련되었는지는 제외하고 말한다면.)
공부하고자 한다면 유익한 이론도,실천 사례도 많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개성과 독특함을 지닌 교사와 학생에게 알맞은 교육과정, 지도방법을 찾아 ‘처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 또한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능력이겠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전문가가 될 수 없고, 그 시간 동안 만날 아이들에게 아무 것이나 ‘처방’할 수도 없기에 더 고민은 많아진다.
‘내가 가르치는 내용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할 것인가?
나는 이 지식을 학생 수준에 맞게 자유 변형할 만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2. 무엇을 선택할까?
처음에는 뭔가 선택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했지만 갈수록 그것이 당장 충분하진 않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교사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나 학생을 존중하고 특별하게 대하는 태도, 단호한 태도 등은 그것이 진실되다면 학생들에게 배움으로 다가오리라고 믿는다.
게다가 요즘엔 조금만 찾아보면 좋은 실천 사례와 서적이 많이 있고, 참고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본보기도 많다. 하지만 어떤 좋은 방법을 사용해 보려고 할 때 단지 ‘좋아 보여서’가 그 이유라면 곤란할 것이다. 겉보기엔 괜찮을지 모르나 이것저것 산만하게 뒤섞여 ‘껍데기’는 있어도 ‘알맹이(진짜 배움)’는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의 우화가 있다. 까마귀는 아름다운 새를 뽑는 대회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 고민하다가, 다양한 새들의 깃털을 몰래 주워 온 몸에 꽂은 채 자신을 뽐낸다. 그 순간 든 깃털이 자신의 것임을 눈치 챈 깃털 주인들에게 망신을 당하게 된다. 까마귀는 자신의 다른 장점에 집중하거나, 까만 깃털의 장점을 생각해 보고 깃털을 다듬거나 하는 대신 타인의 기준에 자신의 껍데기만 맞추는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좋아 보여서’ 아무 것이나 냉큼 받아들이는 대신, 과감히 버릴 것은 버려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까마귀처럼 다른 사람의 평가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렸던 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버리고 싶은 것이 많지만 먼저 떠오르는 건, 학생과 교사가 '한 쪽은 가르치고 한 쪽은 배운다'는 고정관념이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사회 현상에 관심이 부족하고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보다 과학이 재미있다고 이과를 선택했지만, 교직에 서고 나서 사회를 가르치기 위해 수업 준비를 하고 부족한 지식을 조금씩 메우며 사회에 대한 관심도 커지게 되었다. 결국 가르침을 통해 내가 많이 배운 셈이다.
늘 체육은 정말 좋아하지 않았지만 체육 수업을 할 때 아이들의 참여를 위해 재미있다는 메소드 연기(?)를 하다가 실제로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아끼는 제자들이 체육을 좋아하니 나도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운동 경기에 재미를 느끼기도 했고. 또, 아이들에게 꿈을 이야기하기 위해 내 삶의 태도부터 돌아보게 되었다.
교사가 제대로 알고 학생들 개인에 맞게 즐겁게 가르치는 것, 자신의 삶에서 바른 태도를 실천하면서 자신의 삶으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모습이다. 교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해보지 못한 것들을 가르칠 때, 아이들은 배부른 공부 대신 공갈빵처럼 텅 빈 지식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해 글귀로 적어본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지식을 가르친다면,
듣는 이가 제대로 이해하길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내 것으로 소화하고 있는 지식을 가르친다면,
이미 잘 아는 동네의 길을 알려주는 것과 같이 쉬울 것이다.
그리고 그 가르치는 목소리엔 자신감과 힘이 있어, 그것이 듣는 이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내가 진실로 동의하지 못한 철학을 강요한다면,
그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힘이 부족할 것이다.
때로는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어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진실로 동의하고 잘 아는 철학을 펼칠 때는
그저 목소리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를 통해 이야기할 것이다.
내 존재의 생생함이 전해질 것이고, 진심어린 태도를 듣는 이도 느낄 것이다.
만일 그 철학이 듣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면, 새로운 선물이 될 것이다.
#3. 나는 나로 살고 싶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김수현, 마음의 숲)에서 저자는
‘나다운 삶을 찾을 것’이라는 조언을 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너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어른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아이가 나약하고 열등한 존재임을 각성시켰다. 많은 부모는 아이의 나약함과 열등함을 이유로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으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빼앗았다.
[과정]없이 어른이라는 [결과]만 남은 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나이를 먹어서도 멘토를 찾아 다닌다.
그러나 혜민 스님도, 한비야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지 못한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경험과 탐색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학생들이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해선 일단 ‘교사’라는 사람 또한 ‘나답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글은 나에 대한 반성이다. 늘 갈대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최근 ‘하브루타’ 교육이 화제가 되었는데, 유태인들이 서로 질문하고 가르치며 지식을 제대로 익히는 교육 방법이 혼자 익히는 것에 비해 더 오래 기억에 남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르치는 것이 가장 깊이 있게 제대로 배우는 방법이라면,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해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직업일 것이다. 초등교육은 중, 고등학교 교육에 비하면 인성 및 역량 교육의 비중이 훨씬 큰 편이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나의 삶 또한 성찰하고 다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더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해야 하니 무겁고 힘든 마음도 들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나를 위해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신기하게도 직접 내 직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참말 고마운 일이 아닐까?
(그러나 교사가 도덕책 속 철수와 영희 같은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런 아이를 길러내는 것에 의구심이 있다. 어른의 말에 '순종' 하는 편리한 아이들을 원하는 어른의 욕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니 여기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