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편지를 하겠어요. [여름방학 선생님 방학 숙제]
여름엔 편지를 하겠어요.
라떼에는 편지를 참 많이 썼다.
나 때의 방학은 참으로 길었다. 토요일에 꼬박꼬박 등교했으니 요즘과 다를 수밖에 없다. 방학이 긴 만큼 숙제도 많았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이 선생님께 편지쓰기였다. ‘선생님은 방학인 데 뭐 하세요?’라는 질문이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은 나의 일상이지만,
그때는 무엇이 그리 궁금했는지 보내는 순간부터 기다림과 설렘으로 가득하게 했다.
그때까지는 선생님에 대한 애틋함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옛날 앨범 한편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선생님의 짤막한 편지를 볼 때면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요즘에 누가 편지를 쓰나 싶다.
요즘에는 편지를 쓸 일이 잘 없다. 디지털 소통이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굳이 손글씨에 힘을 낭비하려 하지 않는다.
쭈글쭈글 따라 그리던 손 그림 대신에 형형색색의 재미있는 이모티콘이 등장했고,
우표 대신에 노란 숫자 1이 내 편지가 잘 전달되었는지 알려준다.
더욱이 글로써 제 생각을 표현하는 일에 서툰 요즘 아이들에게 편지라는 옛날 유물로 감성팔이 하기에는 편지는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세상이 디지털화되다 보니 아는 사람들도 많아져 손 편지보다는 전화 한 통, 전화 한 통보다는 문자 하나,
문자 하나보다는 카톡 이모티콘, 심지어 SNS에 올린 내 소식을 알아서 보든지 말든지
궁금한 상대가 내 안부를 찾아봐야 하는 세상이 와버렸다.
방학 숙제 편지쓰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런저런 안타까움에 선생님께 편지쓰기 숙제를 부활해봤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다.
일기 쓰기도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손 편지 쓰기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연예인 광적 팬으로 활동도 아닌 선생님의 방학이 뭣이 궁금할 것이며, SNS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데 하고 싶은 말이 뭐가 있겠느냐 싶다.
우표는 물론이고 우체통을 찾아보기도 힘든 시기에 핸드폰으로 보내면 될 것을 굳이 편지지를 사서,
손으로 글씨를 꾸역꾸역 쓰고 우체국까지 가야 하는 번거로움은 선생님께 편지쓰기라는 나만의 로망일 뿐 아이들에게는 그저 그런 숙제일 뿐이었다.
결국 저조한 답장 회수율과 의미 없는 숙제를 위한 편지들로 방학 과제를 검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편지를 받고 싶다.
그런데도 나는 ‘선생님께 편지쓰기’를 포기할 수 없다.
손 편지가 어려운 만큼 보람차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왜 편지쓰기가 어려운지 원인 파악이 필요했다. 우선 아이들이 내게 할 말이 없었다.
예전과 달리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던질 수 있는 사제 간으로 변한 요즘 선생님께 하지 못한 말이 뭐가 있을까,
있다 하더라도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또한 짧은 방학 시간에 아이들은 계획이 빡빡하다.
방학이라기 보다는 긴 연휴쯤으로 느껴진다. 이 연휴 기간에 가족여행도 가고 학교에서 방학 교육활동도 하고 학원도 가야 하다 보면 숙제할 여유가 부족할 법도 하다.
아이들이 안 쓰면 내가 쓰면 된다.
이럴 때일수록 역발상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움직이는 건 과제에 찍힌 도장이 아니라 감동이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내가 먼저 쓰면 된다.
어려운 일이다. 일선 학교의 교사라면 3번을 중복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학기 말 나이스에 아주 좋은 말로만 생활기록부를 입력해야 하고, 조금 순화하고 늘려서 통지표에 가정통신문을 써야 한다.
여기에 또박또박 손글씨로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준다는 것은 삼중고임에 틀림이 없다.
모두가 예상하듯 학생 하나하나에게 할 말을 떠올려야 함은! 미워 죽겠는 아이에게 나의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은! 한 명당 한 장씩 손글씨를 써야 함은!
아주 매우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답장받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있다.
카페에 앉아 커피 향을 음미한다.
어울리지도 않은 편지지와 볼펜 한 자루를 꺼내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함을 억누르고 편지를 써 내려간다. 몇 번을 후회했지만 쓴 게 아까워 멈출 수가 없다.
그러길 두어 시간, 이제 3명 남았다. 뒷번호라서가 아니라 아이에게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 학기를 함께 해놓고도 상투적인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내가 무관심했다거나 어쩌면 글로 아이에 대한 내 솔직한 마음을 남기기 두려웠을 수도 있다.
마지막 편지지를 채웠을 때 아이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편지지에 무거운 마음을 비워본다.
한 학기 동안 미련한 자존심에 아이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고마움과 미안함을 나지막이 고백했다.
나에겐 이 순간이 고해성사이자 이곳이 진실의 방이다. 쑥스러움에 민망함에 하지 못한 마음을 털어놓으니
그동안 미움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아이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른이라는 핑계이자 선생님이라는 잣대로 솔직하지 않았던 껍데기를 벗고 감정을 고백했다.
남은 시간보다 나은 어른의 모습으로 대하기를 다짐의 말을 남긴다.
아이에게 쓰는 편지는 그렇게 나를 돌아보는 반성문이자, 아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부적이자, 한 학기 동안 담임으로써 스스로 점수 매긴 성적표가 된다.
아이들에게 편지 쓰는 요령이 생겼다.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몇 해 동안 편지를 쓰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가장 먼저 인사말을 가볍게 던진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 식상하지만 다정한 말로 안부를 묻는다. 그 다음 아이와 나의 연결고리를 적는다.
아이와 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사건이나 감정이 담겨있는 에피소드로 아이가 나에게 특별한 존재임을 각인시킨다.
그 뒤로 그동안 전하고 싶었던 감정을 솔직하게 전한다. 고마움이라던가 미안함이 주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감정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에 대한 축복이 가득 담긴 말을 남겨준다.
여기서 아이 이름 앞에 별명이나 수식어 하나를 붙여주면 화룡점정이다.
스승의 날이나 어버이날, 아이들에게 편지쓰기 활동할 때도 이처럼 알려주면 많은 아이의 편지 속에 특별한 의미가 담기곤 한다.
편지쓰기는 학급 운영의 양념이 되어 준다.
뭐든 잘하는 것은 돋보여야 한다.
이왕 편지를 쓰는 김에 의미를 더 살리는 비결도 생겼다.
보통 방학 시작쯤에 맞춰서 가정으로 편지를 보낸다. 이는 선생님 편지라는 선물로 아이들에게 기다림과 설렘을 주는 한편,
학부모에게 교사가 아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아이들이 안 보여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부모의 호기심을 막진 못한 것이다. 몰래 훔쳐보기를 기대하며 미사여구로 가득한 이쁜 손 편지를 보낸다면 편지의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아이들은 손 편지에 무감각해도 학부모 세대는 우리와 같이 손 편지에 로망이 남아있는 세대다. 작은 정성이 학생과 학부모를 감동을 줄 수 있는 좋은 투자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망설여질 수도 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안타깝게도 ”그래야 해!”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학생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만큼 글씨체나 맞춤법에 대한 부담감, 손글씨에 피로감, 사소한 말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기대와 다른 아이들의 반응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그렇게 하면 뭐하나 라는 회의감이 가득한 활동임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못한다. 나 역시 학기 말 바쁜 업무에 틈을 낸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교사가 언제부터 가성비에 연연했던가.
바뀔 것 같지 않을 아이들에게 관심을 퍼붓고, 내일이면 또 원상태로 돌아올 아이들에게 맹목적인 희망을 품는 게 교사 아니었던가.
나는 교사의 무의미한 희생은 없다고 믿는다.
여름방학이 다가온다.
매년 그랬듯 나는 두꺼운 편지지를 들고 카페를 향할 것이고,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면서 더듬거려 한명 한명 소중한 추억을 글로 써 내려 갈 것이다.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는 교실 문이 닫히면 누구도 평가할 수 없는 담임교사에 대한 스스로 내리는 상장이자 채찍이다
이번 여름방학도 매년 갱신되는 기나긴 한 해 전반전을 차분히 마무리하고 후반전을 준비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짐해본다.
이번 여름엔 편지를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