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겨진 기분] - ep1 과민성대장증후군
한 아이가 보이질 않는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지 5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그저 오겠지라고 생각했다. 무심함이 점점 화가 된다.
‘돌아오기만 해봐, 감히 수업시간에 늦어?’
나 역시 회의니, 수업준비니 하는 핑계로 수업에 늦을 때가 있으면서도 아이에 대해서는 슬슬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분노가 극에 다다르자 아이러니하게 화는 걱정이 되어 간다. ‘
설마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니지?’
머리속은 갑자기 9시 사회부 뉴스가 되었다.
‘학교폭력을 참지 못한 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잘못된 선택을….’
‘심정지 골든타임을 놓쳐 안타깝게도…’
나쁜 상상을 하면 할 수록 더 불안해진다.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모른다. 고민이 깊어진다. 교실을 못 찾을 나이도 아니고 사리판단을 못하는 학생도 아니다.
절대 그럴 일 없기를 바라면서 혹시나 무슨일이 있었까 나서보기로 한다. 재빠른 학생 몇을 뽑아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옥상, 화장실, 창고, 교무실 그리고 또 어디에 있을지 고민하고 나서려는 찰나 뒷문을 열고 아이가 들어왔다.
다행히 어디 다친데는 없어보였다. 표정이 굳어보였지만 아마 더 딱딱해진 내 표정 때문인 듯했다.
안도감에 이상하게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왜 늦었어?”
“화장실 다녀왔어요.” 그 아이는 나지막히 대답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가 떠오른다. 아주 옛날일임에도 그 상황이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
멀리서 선생님이 오신다. 종소리와 함께 교실로 오시는 선생님의 발걸음이 들려온다.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 앉는다.
어린 생각에 우리가 잘못 한 게 없는 데도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우리 선생님의 별명은 무지개였다. 요즘 말로 하면 깔맞춤이 대단하셨다.
코트와 치마 스타킹이 항상 같은 색이었다. 빨간 코트 빨간 치마 빨간 스타킹, 보라색 코트 보라색 치마 보라색 스타킹, 오늘은 노란색이다.
네모난 안경속에 날카로운 눈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시려는 느껴졌다.
“우당탕탕탕”
책상위에 필통이 떨어졌다. 연필의 소란스러운 춤사위가 끝나고 선생님이 돌아보셨다.
“누구꺼야” , “ 성환이꺼요” 아이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우리반 규칙은 간단했다.
필통을 떨어뜨리면 다른 친구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반 전체에게 사탕을 돌려야 했다.
그 당시 큰 플라스틱 필통이 유행이었다. 나 역시 생일을 맞아 부모님께 선물로 그 필통을 받았다.
내 필통은 열면 이층이 되었다. 필통 윗부분에는 퍼즐이나 게임이 자리 잡았다. 기능이 많으니 부피도 커 2학년이 다루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 날은 내 앞 친구가 일부로 쳐서 떨어뜨렸다. 선생님은 전혀 몰랐다. 뒤 돌아본 선생님의 표정이 무섭다. 하지만 내가 안했다고 말하기는 더 무서웠다.
친구에 대한 배려라는 선생님의 교육 목적과 달리 아이들은 그 순간을 즐거워했다.
누군가가 필통을 떨어뜨리면 자연스럽게 다음 날은 사탕을 선물 받는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약아빠진 아이들이 생겼다.
선생님이 보지 않는 사이 다른 친구의 필통을 아슬아슬하게 걸쳐놓기도 했다. 필통이 떨어지면 환호성까지 들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긴장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 었다. 우리집은 대대로 장이 약한 집이다.
나 역시 아버지를 닮아 유제품을 소화하지 못해 화장실을 자주 간다. 그래서 우유급식을 가급적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독 그 해에는 우리반 모든 학생들이 우유급식을 해야 했었다.
수업을 마치고 알림장을 쓰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팠다. 여기서 실수를 하면 놀림감이 될게 분명했다.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학교에서 응가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까 두려웠다.
줄을 세워 알림장을 검사하시는 선생님께 갔다. 나즈막히 '화장실을 가고 싶다'라고 말하는 내게
"뒤에 가서 줄서"
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배가 너무 아파 다시 한번 말하자 이번에는 음성을 올리셨다.
긴장이 더해졌을까? 배는 더 아파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뒷문을 통해서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이 바지에 실수하지 않았다. 정말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내 어린 기억에 급했던 만큼 그리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교실에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아이들은 엄숙하게 앉아있었다.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온 내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억울하고 비참했다. 차라리 교실에서 싸버릴 걸 그랬다.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형벌은 가혹했다. 모든 아이들 앞에서 혼낸 것도 모자라 부모님께 반성문을 받아오라 하셨다.
아직도 내 인생에서 그 말을 엄마에게 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 비참했다. 사실 그 뿐이었으면 했다.
그 후로 나는 학교에서 대변을 못 보게 되었다.
심지어 아침 등교전에 집에서 억지로라도 대변을 봐야 했다. 학교에서 대변이 마려울까봐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등교시간이 늦춰짐은 물론이고 오랜시간 변기에 앉아있는 게 건강에 좋을리도 없었다.
걱정하시는 부모님과 여러 병원에도 가봤지만 '신경성'이라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어느 덧 습관이 되고 30여년간 트라우마로 이어지고 있다.
내 학창 시절내내, 중요시험직전에도, 여행 출발 직전에도, 출근하기 전에도 난 신성한 의식처럼 변기에 앉아야 한다.
"꼭 나서려고 하면 화장실에 앉는다."라는 주변인에 말에 아무 할말이 없어진다.
긴장을 하면 그 날의 감정이 떠오르고 배가 많이 아파지기 시작한다.
특히 내가 마음대로 화장실에 갈 수 없는 상황이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선생님이 된 지금도 교실을 잠시라도 비울 수 없는 시험시간,
수학여행이나 현장체험학습을 가기 위한 버스이동시간,
아침 시간 교통체증으로 도로에 갇힐 수도 있는 출근시간은 여전히 식은땀을 흘릴 수 밖에 없다.
그 날, 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욕구가 평생의 죄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