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학교 바라보기] 1. 꿈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꿈은 있는가(3)
정의를 잃어버린 세상
이 사회에서 옳음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 세 가지.
생존에 갇혀 있는 개인, 생존을 추구하는 사회, 생존을 전가하는 권력.
하지만 이 나라에서 정의는 패배한지 오래 입니다.
항일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친일을 하던 자들은 권력자가 되었고, 평민의 편에 섰던 노무현 대통령마저 죽임을 당했지요.
정의의 패배로 모든 초월자는 죽었고, 평민은 생존하고 있으며, 권력자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제도는 생존자들을 더더욱 생존에서 허우덕 거리도록 몰아넣고 있어요.
요즘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대기업과 공무원밖에 없다고 말해요.
하지만 대기업에 들어가도 계속 생존의 연속이예요.
월급이 많다고 부러워 할 수 없어요. 제 친형도 LG계열사에 있지만 지금 바짝 벌어야 된데요.
언제 잘릴지 모를 불안 속에서 생존하며 살고 있어요.
이들에게 승진은 선택이 아니예요.
승진이 안되면 바로 도태되어 회사를 나가야 합니다.
정규직이라는 자리도 이런데 보장 받지 못하는 기간제, 계약직은 오죽할까요.
기간제, 계약직을 늘리는 일은 집을 월세만 두려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돈을 벌어도 주인에게 줘야 할 뿐 내 집을 가질 수는 없죠.
집을 갖지 못한,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불안 속에 생존을 걱정해야 되요.
우리도 만약 2년마다 다시 계약을 하고 잘릴 수 있는 환경에 있다면 우리가 꿈을 꾸고 살 수 있을까요?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생존과 만족을 넘어선 사람이지요.
그리고 그 전제는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원빈이 아니예요.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선 내일을 꿈꿀 수 없어요.
정의를 잃어버린 세상에서는 옳고 그름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 상위 욕구를 가지고 살 수가 없어요.
다시 이 나라에 안중근 같은, 안중근의 어머니 같은 초월자가 나올 수 있을까요?
기차 딜레마
당신은 지금 기차의 운전사이다.
저기 보이는 선로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이가 서 있다. 이 기차를 멈추기에는 늦었고 살리기 위해서는 오직 기차를 틀어 이탈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기차 안의 100명의 모든 승객이 사망한다. 당신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나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100명을 죽인다면 우리는 100배의 희생을 감수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희생은 이런데 쓰는 말이 아니다. 100명의 나와 상관없는 다른 목숨을 죽여 내 소중한 한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은 감수할 수 있으나 내 아이는 100명을 죽여서라도 지키고 싶은가?
당신이 이미 세월호의 선장일지 모른다.
또, 그 아이를 세월호의 선장으로 키울지도..
이런 사람이 100명 중 한 명만 존재해도 확률적으로 인류는 전멸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기차의 선로에 보이는 당신의 아이를, 부모를, 자기 자신을 죽여 모두를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모두가 살 수 있을 것이다.
정의가 죽은 세상에 미래는 없다.
적어도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좀 더 정의롭길 기대한다.
내가 죽는 날까지 내 목숨은, 내 죽음은 정의를 향해 있기를..
지금 이 세상에서 생존을 확보하는 것만도 쉽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진 만족자들은 계속적인 만족을 위해 생존자 위에 군림하고 있죠.
생존을 확보하고 만족의 유혹을 넘어 실존에 이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아요.
이 세상이 안전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이 되는 길은 내가 먼저 초월자가 되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을 초월자들로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구가 더 높은 곳에 이를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 꿉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목소리들이 초월에 이르는 가치를 갖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