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사] 10. 특별한 시달림
2018년도 제가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께서는 불필요한 외부 사업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으시던 분이셨습니다. 간혹 공문으로 이런저런 행사나 모집 공고가 있어 여쭤보면, 굳이 물어볼 필요 없고 부장 생각에 하고 싶으면 신청하고 필요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해 9월에 왔던 '디지털교과서 선도학교 모집' 공문을 보고는 별 생각없이 넘겼습니다. 그런데 교장실에서 콜이 왔습니다.
'김부장, 이번 디지털교과서 선도학교 모집에 지원해보면 어떨까?' 우선 제가 디지털교과서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서 - 이미 학교가 혁신학교로써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들 피로도가 있을 것 같고, 디지털교과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상당하며, 제가 관심이 없다 등등등 -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그래도 선도학교 예산이 천 육백만원이라는데, 그걸로 기자재도 좀 사고 학교 여러가지 필요한 물품을 사면 좋지 않겠어?'라시며 한 번 해 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해 보자'면, 이야기는 대충 끝난 셈입니다. 게다가 과학정보예체능부장 초빙교사인데, 이건 거절하거나 사양하기도 힘든 문제입니다. 저희 교장 선생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 보자'고 하셨던 그 사업에 그렇게 발 담그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역시 예산을 쓰는 문제였습니다. 천 육백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약이 있었습니다. 예산의 50%까지만 비품구입비, 즉 자산성 물품을 취득할 수 있었고, 나머지 50%는 교육운영비나 일반수용비 등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팔백만원은 디지털교과서 활용을 위한 태블릿을 구매하면 되지만, 나머지 팔백만원은 어떻게 사용한담? 예산을 끌어안은 후, 작년 말 정산서를 제출할 때까지 1년 3개월동안 내내 그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목적사업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2014년도에 두드림 학교 운영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그냥 책 사고 자기주도학습 캠프 운영해서 얼마 안 되었던 예산을 잘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교과서 선도학교는 금액도 만만찮았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교과서'를 목적으로 두었기 때문에 예산을 쓰기가 너무 애매하였습니다. 이런저런 경로로 확인한 바, 디지털교과서 선도학교 운영의 목적은 '디지털교과서 활용 저변 확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교과서도 배움의 수단인 교과서의 다른 형태이고, 교과서를 활용하는 것은 거의 수업 시간인데, 디지털교과서를 수업 시간에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예산을 써야 하는가가 너무 막연하였습니다. 그래서 선도학교 운영 담당교사들이 모이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비품구입비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실에 무선AP도 달고, 태블릿도 더 많이 사고 해야 저변이 확대되는데, 그걸 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두고는 어떻게 저변확대를 하라는 것이냐는 눈물 어린 호소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담당 장학사님들은 '어렵겠지만, 노력해달라'는 말로 우리의 호소가 수용될 수 없음을 알려주었고, 담당자들은 그저 자신의 역량으로 이 세파를 헤쳐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량 없는 저는... 그냥 두 손 놓고 있었구요.
가장 큰 어려움은, 제가 디지털교과서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내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배움이 이루어지는 아날로그한 형식을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물론, 디지털 세계가 가진 어마어마한 배움에의 가능성과 그를 실현할 필요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교실은 그것을 위한 역량을 키워가는 곳이며 그런 과정은 아날로그한 방식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뭐, 디지털교과서가 서책형 교과서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느냐는 선입견도 크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업 2년차인 2019년이 되면서, 더 이상은 두 손 놓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3월이 시작되면서 남은 팔백만원이 계속 제 어깨를 짓누르게 되었고, 예산을 쓰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단추를, 디지털교과서를 직접 교실 배움에서 활용해 보는 것으로 시작한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산을 사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회자되던 방식은 외부 업체를 불러 디지털교과서 활용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운영비로 꽤 많은 돈을 한 번에 털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학교들이 과학의 날 행사와 연계하여 디지털교과서 체험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외부 업체에 AR/VR 체험 행사를 맡기면서 덩달아 디지털교과서도 함께 체험하도록 하는, 그리고 예산은 디지털교과서 선도학교 예산으로 집행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저건 디지털교과서와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데? 아무리 예산을 쓰기 어렵더라도, 목적에 맞게, 디지털교과서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식으로 예산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력하게 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디지털교과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써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써야하는 필요성도 몰랐던 탓이긴 하지만, 예산을 써야하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디지털교과서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커졌고, 실제 배움 시간에 디지털교과서를 꺼내어 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크게 짜증도 나고, 번거롭기도 하였습니다. 디지털교과서는 계정 동기화 및 저작권/사용료 때문에 계정 로그인을 한 사용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6학년 어린이들이, 이렇게나 로그인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제일 당혹스러웠던 질문은 '선생님, 제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뭐에요?' 였습니다. 이 어린이들은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가진 인격권을 배운 바 없이, 그저 디바이스로 정보의 바다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매체 사용에 능숙하다, 는 선입견이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두 주 정도는 매 수업 시간마다 어린이들의 계정 로그인을 해 주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배움의 접근 방식이 결정되었습니다. '자, 선생님이 다른 친구들의 로그인을 돕는 동안, 오늘 배울 내용을 한 번 스스로 살펴봅시다'
디지털교과서가 가진 매력이, 이렇게 한 번 살펴보자고 했을 때 학생들이 스스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점입니다.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의 디바이스에 로그인을 돕고 있는 동안, 어린이들은 오늘 배울 텍스트를 읽어보기도 하고, 동영상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살펴보기도 하면서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모든 어린이들을 디지털교과서의 세계로 빠뜨리는데 성공한 교사는, 한숨 돌리면서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배울 것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서책형 교과서는 작은 지면에 얼마 안되는 텍스트로 배울 내용을 제공하고 있으며, 참고자료라고 해도 2D 형태의 작고 고정된 컬러 인쇄물 두어장면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디지털교과서는 여기에 더해, 2D 형태의 인쇄물에 애니메이팅을 주면서 생동감을 더할 뿐 아니라, 텍스트의 내용을 풍성하게 보강할 수 있는 다양한 동영상 자료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디지털교과서 또한 서책형 교과서와 같이 집필진이 집필하고 심의진이 심의하였으니, 그 자료의 질과 수준은 전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서책형 교과서로 교실 수업을 해 나가더라도, 교사가 이런저런 다양한 자료를 준비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텍스트의 부족함을 메울 수 있습니다. 많은 교사들이 프레젠테이션 자료나 동영상 자료를 준비하는 까닭이 그런 것이겠죠. 그러나 디지털교과서와는 방향성에 차이가 있습니다. 서책형 교과서 중심으로 교사가 준비한 자료를 배움에 제공하는 것은 학생이 수동적으로 배움에 참여합니다. 학생들은 자료가 제공되는 화면을 향해 앉아있고, 모두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자료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디지털교과서를 통해 배울 때는 학생이 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싶지만, 학생이 디바이스를 스스로 작동하면서 배워갈 수 있다는 것이 교실의 배움을 얼마나 활기찬 것으로 만드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개인이 자료를 서칭하는 시간이나 순서, 횟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도 학생의 능동성에 한몫 합니다.
그러다보니, 교사의 질문도 조금 더 공격적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운 것에 대해 물어보는게 아니라, 배운 것을 토대로 하여 물어볼 수 있게 됩니다. 뭘 알게 되었니, 가 아니라, 알게 된 것을 토대로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니, 같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40분 내내 자료를 소화하기 바쁜 수업이, 20분 정도에 자료를 훑어본 후 나머지 20분을 배운 것을 토대로 이야기나누고 토론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는 배움이 가능하게 되는 셈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디지털교과서를 두고, 디지털 정보의 세계를 유영하는 일을 조금 더 실제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서책형 교과서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정보를 디지털 세계에서 찾고 조직하는 수업을 해 보았습니다. 물리적인 어려움은, 학생들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번갈아가며 조작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서책형 교과서 펼치고 학습지 펼치고 연필 들고 태블릿 조작하고 검색하는 활동이, 학생들을 얼마나 정신없고 분주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디지털교과서(와 온라인 학습 커뮤니티 플랫폼 위두랑)를 사용하면서 학생들은 굳이 책상 위에 이것저것 널브러뜨리지 않고 디바이스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찾고 검색하고 조직하고 유목화하고 정리하고 확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그런 물리적 환경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서책형 교과서의 적은 내용만 가지고는 학생들이 디지털 정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였지만, 디지털교과서에서 제공되는 조금 더 넓고 정제된 자료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디지털 정보의 세계에서 어떤 것들을 찾아야 하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게 돕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과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활용하여 배우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래도 디지털교과서를 실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예산을 쓸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의미없는 소모품도 조금 살 수 밖에 없었지만, 저는 저변을 넓히고 확장하는데 예산을 유용하게 썼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달림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덕택에, 조금 더 나은 배움을 만들 수 있었다는 기쁨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사에게 의미없는 시달림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사 스스로 의미없는 시달림이라 취급하며 외면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나랏돈을 조금 더 의미있게 사용하고자 하는 일개 교사의 작은 생각이, 스스로 시달리게 만드는 일거리가 되었지만, 덕택에 가지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을 바꿀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은, 의미있는 교실 배움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에서 저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판단은, 남의 몫이 아니라, 교사 자신의 몫이며, 교실의 몫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