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선하다 #10. 그렇게 친구가 되어간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딸 아이가 갑자기 동대문 액세서리 상가에 가자고 했다.
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라고 말할 게 아닌 것 같다.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액세서리 제작 도구를 불과 며칠 전에 내가 찾아주었기 때문이다.
그 물건들을 딸 아이 손에 쥐여 주면서 나는 또 액세서리 상가 타령에 휘말리게 되었다.
어느 날을 콕 찍어 약속했다가 혹시나 다른 일이 생겨 내가 약속을 못 지키면 딸 아이는 온갖 원망과 실망을 온몸으로 보여주는지라 다음에 가자고 얼버무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부터 매일 동대문 타령이었다.
이런 걸 보면 내가 뭔가 버릇을 잘못 들인 것 같다.
우리 딸은 나에게 츤데레라고 한다.
좋은 말인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지가 다 이겼다는 뜻인 것 같다.
자기가 요구하는 걸 못 들어주면 미안해하는 나를 간파하고, 끊임없이 자기 요구사항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동대문 언제 가냐고 단도직입적으로 꾸준히 물어보면 나한테 야단맞을 것 같으니, 틈새를 잘 공략한다.
“엄마 오늘 일찍 와?”
“응. 별일 없어.”
“그럼 동대문?”
뭐 이런 식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평일 내내 바쁘다 토요일까지 나가는 엄마가 야속했을 터다.
그런데 딸 아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괜히 더 미안해졌다.
오늘 일은 점심 때쯤 끝나니 금방 오겠다고 했다.
맛있는 거 먹자고 말할 틈도 없이 딸 아이는 말했다.
“그럼 동대문?”
그만 좀 얘기할 것이지,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딸내미 때문에 순간 살짝 욱했다.
하지만 내가 가는 곳이 마침 혜화역 근처라 오후에 동대문에 가는 것으로 극적 타협을 마쳤다.
딸 아이와 만나기로 한 곳은 대학로 어느 북카페였다.
나도 처음 가는 곳이었는데, 딸 아이는 자기가 알아서 찾아오겠다고 했다.
4학년 때부터 지하철 타고 혼자 다니게 한 보람이 있는 순간이었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딸 아이는 기가 막히게 잘 찾아왔다.
지하 북카페 계단을 내려오는 우리 딸이 그날따라 부쩍 커 보였다.
예쁜 멜빵 바지에 새로 산 슬립온을 신고 나타난 딸이 더 이상 아기 같지 않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동대문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가본 액세서리 도매 상가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내가 지금 어디쯤을 돌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딸 아이는 내 팔찌에 들어갈 재료를 고르라고 했다.
자기가 쏜다는 말과 함께….
내가 평소 아무 생각 없이 하고 다니던 팔찌, 귀걸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나니 신기했다.
자기 손톱보다 작은 재료들을 하나씩 바구니에 담으며 신난 딸 아이를 보며 자책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여기 한번 같이 와주는 걸 왜 그렇게 미뤘냐고 말이다.
1시간이 넘는 구경을 마치고 다른 쇼핑몰에 들렀다.
딸 아이가 입고 나온 바지 엉덩이가 너무 꽉 껴서 작아 보였다.
옷 좀 사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바지며 티셔츠며 양손 가득 딸 아이 옷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 엄마랑 이렇게 같이 쇼핑하니까 너무 좋다. 엄마도 재밌었지? 다음에 또 오자.”
딱 내 마음이 그랬다.
“그러게. 액세서리 상가도 진짜 신기하고, 옷 구경도 재밌더라. 다음에 또 오자.”
이날, 훌쩍 커버린 딸 아이가 이끄는 대로 다니면서 같이 구경도 하고, 어느새 딸 아이에게 이것저것 질문까지 하는 나를 발견했다.
맨날 싸우고 지지고 볶지만, 이제는 꼭 친구 같기도 하고 든든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날이었다.
그날 저녁, 딸 아이는 나를 위해 손수 예쁜 팔찌를 만들어주었다.
“아유 우리 딸, 이제는 엄마 친구 같네.”
“야단칠 때는 ‘내가 니 친구야?’라고 하면서….”
철딱서니 없는 엄마와 철든 딸은 그렇게 친구가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