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잡설 #6. 질문
#1. 질문
질문 [質問] 명사
1.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물음(표준국어 대사전)
2. 모르거나 의심나는 점을 물어 대답을 구함.(고려대한국어대사사전)
질문들의 뜻이다. 질문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교실에서는 질문이 빈번하게 이뤄진다. 아니, 교육이란 것이 생긴 이후로 질문이 없던 적은 없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문답법으로 수업을 하지 않았던가?
#2. 질문의 힘
질문은 학습자에게 여러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런저런 검색을 하다 보니 <질문의 7가지 힘, 도로시 리즈>에서는 질문이 7개의 힘이 있다고 알려준다. (https://shkdra.blog.me/221288383932참고)
첫 번째 힘 ―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온다
두 번째 힘 ― 질문은 생각을 자극한다
세 번째 힘 ― 질문을 하면 정보를 얻는다
네 번째 힘 ― 질문을 하면 통제가 된다
다섯 번째 힘 ― 질문은 마음을 열게 한다
여섯 번째 힘 ― 질문은 귀를 기울이게 한다
일곱 번째 힘 ― 질문에 답하면 스스로 설득이 된다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만 읽었지만 고개가 꽤 끄덕여지는 것들이다. 질문을 하면 사람은 생각을 하고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질문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니 통제도 되고 마음도 열릴 거다. 일곱 개 모두 좋은 말들이다.
#3. 질문의 종류
또한 <Good Question, 아와즈 교이치로> 의 책에서는 질문은 4가지로 구분된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senia74/221353969501참고)
첫 번째 질문 : 가벼운 질문
- 상대와의 관계를 더 좋게 만드는 질문
예)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에요?
두 번째 질문 : 나쁜 질문
- 상대방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상대방의 깨달음, 행동,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질문
예) 결혼 안해요?
세 번째 질문 : 무거운 질문
- 질문받은 사람이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지만 어떤 깨달음이나 행동으로 연결되는 질문
예)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사람 중 누군가에게 꼭 사과해야 한다면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하시겠어요?
네 번째 질문 : 좋은 질문
- 질문을 받은 사람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싶어지는 질문이며 대답하기 전 어떤 깨달음이나 행동을 끌어내는 질문,
예) 이건 블로그에서 딱히 없네요.. 이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경우에 따라 다른 듯 하다.
#4. 질문속의 의도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궁금해 한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이 질문에는 의도가 없는 순수한 질문인 경우가 많다. 그저 궁금하니 묻는 거다. 그래서 많은 어른들이 끝없이 대답해준다.
그러나 성인들의 질문은 그 질문안에 다른 뜻이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 페이스북과 오프라인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생각해 봤다. 그리고 그 중 나쁜 질문과 무거운 질문 사이의 것에 대해 글을 써보고자 한다.
보고 느낀 것은 꽤 많은 사람들은 질문을 사용한다. 질문이 시선을 끌기에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형태만 질문일 뿐 사실은 주장하는 바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자. 당신은 빨간 옷을 좋아한다. 당신이 빨간바지를 입고 학교에 출근했다. 그때 교장이 당신을 보고는 “김선생. 빨간바지를 꼭 입어야해?” 라고 했다. 이건 질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질문을 듣는 순간 교장이 과연 궁금해서 묻는 거라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속뜻은 이렇다.
“너 그 바지 입고 오지마!”
교실에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묻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떠든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하거나 말했을 것이다.
“누구야? 떠드는 사람?”
그러면 꼭 곤란하게도 누군가가
“얘요!” 라고 대답한다.
사실은 당신이 원했던 건 아이들일 조용히 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런 질문들은 사실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다. 상대를 압박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질문들이다.
이는 교실 상황에서도 있다.
“선생님이 떠들면 안된다고 몇 번 이야기 했지?”
“자꾸 그렇게 떠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거 같아?”
이런 질문들에 학생이
“세번이요”
“혼날거 같아요"
라며 열심히 대답을 한다면 아마 더욱 혼날거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교직 7년차 정도에 스마트교육이 등장했다. 당시 나로서는 교직이 힘들었는데 스마트교육은 탈출구였다. 그래서 수업에 열심히 활용했다. 아이패드에 교과서 사진을 넣고 수업하면서 펜으로 글씨를 쓰며 아이들과 열심히 수업을 했다. 동료공개수업에서도 사용을 했었다. 그 당시 6학년이었는데 일주알 동안 동료장학(나), 중초연계수업(다른 분), 근처 학교 공개수업(다른 분) 이렇게 셋이 하게 되었다. 열심히 수업준비를 했고 수업공개하는 날 나는 아이패드를 꺼내고 수업을 시작했다. 동료장학이긴 한데 전교직원들이 다 와서 봤고 그분도 왔다. 수업을 시작하면서 5분이 지나는 순간 나에게는 그 분 목소리만 들려왔다.
“저놈 저거 왜 저렇게 수업하는거야?”
“저건 왜 쓰는 거야?”
“저거 하려고 저 수업 했구만!”
그리곤 수업협의를 하는 데 엄청 질문을 받았다.
“그건 왜 쓴거야?”
“수업목표는 왜 그렇게 쓴거야?”
등등. 그리곤 그 뒤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협의 때도 꽤 질문을 당했다.
저 질문들은 나의 대답을 요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냥 공격하기 위한 질문들이었던 거다. 그런데 나에게는 당시 스마트교육은 꼭 필요한 방법이었다. 다만 그것은 나에게는 필요한 방법이지 그분에게는 필요한 방법은 아니었던 거다. 때문에 아무리 필요성을 내가 이야기해도 그분에게는 와 닿지 않았다. 어차피 납득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직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교육방법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오래된 교육법은 있더라도 절대적인 교육법은 없다.
수업시간에 왜 놀이를 사용하나?
수업시간에 왜 pdc를 적용하나?
수업시간에 왜 nvc를 적용하나?
수업시간에 왜 비주얼싱킹을 사용하나?
소프트웨어 교육은 왜 해야 하는가?
디지털교과서는 왜 써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그 방법을 적용하는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지만 다른 이에게는 이유가 될 수 없다.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이유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저 질문들 모두는 왜 그런지 진심 궁금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5. 의도를 명확히 하자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혹은 동료들에게 말할 때 조심하고 있다. 함부로 질문하지 않으려 말이다. 표현은 질문이지만 실제 내용이 질문이 아닌지를 생각해보고 말하는 편이다. 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면 내 생각을 최대한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다.
잡설이 길었다. 질문은 상대를 도와줄 수도 있지만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다. 하긴.... 질문을 잘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