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수록 손글씨 -1-
우리 생활에 디지털이 차지하는 부분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제는 종이책과 펜 보다는 스마트 패드가 우리 생활을 조금씩 차지해 가던 차에, 코로나로 인해 학습 방식의 전면 디지털화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정말 펜 잡을 일 없이 모든 것이 타이핑과 클릭으로 해결될 세상이 다가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정감 가는 손글씨 폰트에 관심을 가지며, 손글씨 교정 책은 매달 베스트 셀러에 꾸준히 올라와 있다. 생각을 담아내고 진시을 전하는 데에는 아직 손글씨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여전히 판서를 가장 좋아하고, 매번 책을 읽고 나면 기억에 남는 구절은 꼭 필사를 통해 마음에 한번 더 담아두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담임을 맡았던 교실에서는 학생들과 손글씨 수업을 함께 했다. 처음에는 '글씨 쓰기'라는 활동은 너무나 익숙해서, 굳이 수업의 요소로 꺼내어 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손글씨는 수업의 요소가 아니라 기초생활습관과 기초학습습관에 모두 영향을 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몇년 전 우리반 학생들과 교실에서 손글씨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디지털이 더욱 위용을 떨치는 이 시기에, 이럴수록 손글씨 이야기를 한번 더 해보고자 한다.
(해당 내용은 티처빌 매거진 2020년도 가을호에 실렸던 글을 재구성 하였습니다.)
#손글씨에 빠지게 된 계기
#노트필기를 좋아하던 학생, 훗날 판서를 열심히 하는 선생님이 되다.
#에프터스쿨의 힘 #펜덕후
어릴적에 글씨를 잘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손글씨 쓰기를 참 좋아했다. 그 때 한참 삼공 펀치 다이어리 꾸미기와 미스터케이 잡지의 콩순이, 코딱지 캐릭터 편지지를 이용해서 손편지를 주고 받는 펜팔 취미가 한참 유행이었다. 손글씨가 취미였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차분하게 집중력을 키워보라며 방과 후 서예 수업에 등록해 주셨다. 어지간히 집중을 잘 못했나 보다. 방과후 수업 시간에 글씨를 쓴 기억보다 난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고 방과후 선생님, 언니들과 놀던 기억이 더 많지만, 그래도 의외로 적성에 맞았던 까닭에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방과후 교실에서 서예를 배웠다.
훗날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본인의 대학교 재학 시절(자퇴 후 청강을 듣던 시기), 서체 수업을 통해 아름다운 글자체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대구 달서구 초등학교의 방과 후 수업을 통해 손글씨의 기본이 되는 한글 자형의 다양한 모양과 조화에 대해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비록 나는 스티브 잡스와 같은 글로벌 인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스티브 잡스의 서체 수업 만큼이나 방과후 서예 수업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학창시절에는 학업을 핑계로 본격적으로 각종 펜들을 섭렵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세상에, 작은 펜 속에 이런 우주가 숨어 있었다니. 부드러운 느낌의 A펜으로 쓰면 이런 글씨가 나오고 잉크가 나오는 원리인 까끌한 B펜으로 쓰면 저런 글씨가 나오다니. 어떤 펜과 어떤 종이를 조합 하느냐에 다양한 노트 정리가 가능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했던 조합은 살짝 갱지 느낌 나는 모의고사 종이에 0.5mm 굵기로 깔끔하게 잉크가 나오던 하이테크로 글씨를 쓸 때였다. 지금도 필통에 펜이 터질 것 처럼 채워진 학생들을 보면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자원 낭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우리 반 학생들이 다 각자의 개성을 가진 개개인이듯, 펜도 각자의 특성이 명확하기 때문에 그날의 종이 상태와 기분에 맞는 다양한 펜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
(언제나 터질 것 같은 나의 필통. 가장 자주 쓰는 펜들만 챙겨 다니고 있다.)
특성 상, 거의 대부분의 펜덕후들은 여학생들인데 각자 필통만 가지고 와도 거뜬하게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새차를 사면 차를 구경하듯 서로 필통을 바꿔서 구경하는 것이다. 서로가 가진 펜들을 한 번씩 써보며 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재밌는 놀이였다. 예전 학창시절 만큼은 아니지만 커서도 나는 가방에 꼭 필통을 따로 챙겨 다니는데, 우리반 펜덕후 여학생들은 내 필통을 참 좋아했다. 선생님 필통엔 비싼 펜이 많아서 신기하다고 했다. 당연히, 직장인이 되었으니 통이 커졌을 수 밖에. 아무튼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손글씨를 좋아하고, 노트필기를 좋아하고, 그 핑계로 대형 문구점의 펜 코너가 너무나 좋다.